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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효심이 만들어낸 세계유산 수원화성

역사학/국내여행

by 가을향기쉼터 2022. 9. 3.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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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등재 시기: 1995년 12월

2. 등재 이유: 동서양의 군사시설 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나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 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흔히 사람들이 수원을 두고 효의 도시라 말한다. 조선 제22대 정조의 지극한 효심에서 태어난 도시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효는 충보다는 앞서는 윤리였다. 거대한 수원의 역사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기는 데서 시작됐다. 신하들의 권력 다툼으로 희생자가 된 아버지 사도세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즉위 14년 되던 해 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길 계획을 세웠다. 전국의 명당자리를 찾았고, 지금의 융릉으로 묘자리를 결정하고 대역사의 기반을 닦았다. 이처럼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지극한 마음에서 수원의 역사가 시작되었기에 "효"는 수원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양주 배봉산(지금의 서울 휘경동)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소를 융릉으로 옮기는 동시에 지금보다 남쪽 8km 아래에 있던 수원을 현재의 위치인 팔달산 기슭으로 이전했다. 이에 따라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고 화성을 건설했다. 한해 수차례 오른 부친의 능참 길 때 머물기 위해 행궁을 짓고, 능사인 용주사를 창건하며 천도 계획까지 세웠다. 그리고 자신을 죽어서 부친의 융릉과 인접한 건릉에 묻혔다. 

수원은 경기도 도청소재지가 있는 시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 담긴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과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이루어낸 곳이다. 수원의 회성은 정조의 정치 이상을 담아 조성한 신도시 이름이자, 신도시 외곽을 감싸는 성곽의 이름이다.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려는 왕의 계획이 발표되자 중앙 대신들 사이에 반대가 있었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무덤을 좋은 자리로 이장하려는 즉 효의 실천이라는 명분에 누구도 반기를 들 수 없었고 조선의 국가이념인 유교는 무엇보다도 효를 중시했다. 나라에 대한 충보다 앞서는 것이 부모에 대한 효라고 생각하는 사회였다. 한편 신도시에 사람들이 살수 있도록 상공업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다지는데 온갖 힘을 쏟았다. 이주한 주민들의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세금을 감면해주고, 박지원.박재가 등 실학자들의 뜻에 따라 상공업을 장려하기 위해 시장을 열었다. 오늘날 수원이 왕갋로 유명하게 된것도 이당시에 발달한 시장에서 연원을 찾을 수있다. 시장 가운데서도 특히 쇠전이 성행해 1950년대 말까지만 해도 충청도와 전라북도의 소장수들이 몰려들 정도로 컸다. 그래서 수원에는 소달구지가 많았고, 소갈비를 구워 파는곳이 많았다고 한다. 대신 관리들이 쓰는 관모나 인삼을 독점해 사고팔게 하고 특혜를 주어 경제활성화하는데 힘썼고 도시경비를 위해 왕의 친위대를 보내 지키게 하였으며 부근지역의 군영에서 우수한 군인들을 뽑아 배치함으로써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이렇게 함으로써 수원은 경제.군사적으로 왕의 강력한 배우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4년후 수원이 도시의 성격을 갖추자 정조는 수원부를 '화성'이라 개칭했다. 화성을 둘러싸는 성곽의 건설을 실학자 정약용에 맡겼고, 정약용은 전통적인 축성 기술을 바탕으로 중국 성곽의 장점은 물론 서양의 과학기술까지 수용하여 새로운 개념의 성곽을 계획하였다. 작업의 효울을 높이기 위해 재료를 규격화하고, 녹로나 거중기 같은 장비를 활용했다. 1794년 2월 정약용의 설계를 바탕으로 영중추부사인 채제공의 주관하에 공사가 시작되었고, 같은해 7월에 장안문의 무지개문, 8월에 장안물과 팔달문의 누각.장락당.낙담헌.서장대, 10월에 방화수류정이 준공되었다. 이듬해 정원에 강무당과 복옹성,2월에 북포루.남암문.적대.서노대. 10월에 남옹성.만석거.남장대.영화정.창룡문.남공심돈 등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796년 5월까지 화서문,남수문,서북공심돈,북암문,동북노내,서포루가 준공되고,9월10월 마침내 성곽을 완공하였다. 10년을 계획한 수원화성을 2년6개월이란 짧은 기간으로 단축한 데에는 신기술의 적용이 큰효과를 보였고 대표적으로 과학기기로 유형거,녹로,거중기등을 들수 있다. 

팔달문 보물 제402호

수원화성의 남문. 성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이름을 따왔다. 북문인 장안문과 함께 크고 화려하게 지었다. 화강암으로 된 호 예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다. 성문 밖으로 방어시설인 반원형의 옹성을 쌓았다. 성문 오른쪽 성벽에는 팔달문 공사에 참여한 책임자들의 이름이 공사 실명판에 새겨져 있다. 서울 숭례문과 유사한 규모와 형태이나 더 크고 섬세하게 꾸며져 있어 정조가 도읍을 수원으로 옮기려 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숭례문에는 없는 옹성을 갖추고 있어 조선 후기의 성문 건축형태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화서문 보물 제403호

수원 화성을 서문, 화강암으로 된 홍예문 위에 단층의 문무를 세웠다. 성문 밖으로 반원형의 옹성을 쌓았고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서북공신돈이 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이 썼다. 

창룡문

수원화성의 동문, 화강암으로 쌓은 홍예문 위에 단층 문루를 세우고 성문 밖으로 옹성을 쌓았다. 규모와 특징이 화서문과 거의 같다. 창룡문 좌측 성벽에 공사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문 부근에는 연무대와 활터가 있다. 

장안문

수원화성의 북문이자 정문, 화강암으로 된 홍예문위에 2층 누각을 올리고, 바깥쪽에 둥근 옹성을 주었다. 특이한 점은 홍예 위에 오성자라는 큰 물통을 만들었다는 점. 다섯 개의 구멍을 갖춘 오성지는 적의 화공에 대비해 물을 쏟아부어 성문을 보호하기도 하고 적이 성문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시설이다. 18세기 이후 성을 강화하기 위해 실학자들이 주장한 것을 실천에 옮긴 결과물이다. 

서장대. 동장대 

장대는 장수가 올라서서 군사들을 지휘하는 대를 말한다.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있는 중층 누락으로 성 안팎이 모두 보이는 전략적 요충지다. 화성장대란 편액은 정조가 직접 쓴 글씨다. 동장대는 동북공심돈과 동암문 사이에 위치한다. 활쏘기와 말타기 훈련을 할 수 있는 훈련장이 있어 연무대라고도 한다. 3단으로 쌓은 대가 있고, 3층 대에서는 총수가 적을 공격하기 편리하게 했다. 

서북공심돈  화서문 앞에 세워진 방어시설, 서북쪽 성벽에서 돌출시켜 남쪽 일부만 성곽에 접하고 나무지 삼면이 돌출돼 있다. 내부는 3층으로 꾸며 맨 아래 치성은 석재를 사용하고, 1,2층 외벽과 3층 아랫부분은 벽돌로 쌓았다. 서북공심돈은 수원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시설로 재료의 유연성과 기능성이 우수하며, 치성의 석재 쌓기 기법과 상부 공심돈의 벽돌 축조 기법 등 독창적인 건축형태와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화성행궁

행궁은 왕이 행차할 때 머무는 임시거처다. 화성행궁은 1790년대 340칸으로 건립되었다가 1796년 화성 축성과 함께 576칸으로 확대했다. 일반적인 행궁이 100칸에서 150칸으로 건축되는 것에 비해 매우 큰 규모다. 이는 정조가 왕위를 이양하고 난 뒤 화성으로 내려와 살고자 했기 때문이다. 혜경궁 홍 씨의 회갑 진찬연을 베풀었던 효의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화홍문(북수문) 수원화성의 북쪽 수문. 수원화성을 남쪽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기 위해 설치한 수문이다. 단순히 물 흐름을 관리하는 것만 아니라 돌다리의 기능도 겸하고, 방어적 기능도 할 수 있도록 총안과 포혈을 갖추고 설계된 실용적인 시설이다. 방화수류정과 함께 수원화성에서 뛰어난 경관을 지닌 두 곳 중 하나다.

방화수류정(동북각루) 보물 제1709호 수원화성을 축조할 때 성곽 위에 꾸며진 정자. 성곽 높은 언덕에 지어져 주변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정자의 기능도 한다. 성벽 안으로 연못이 조성돼 꽃과 용연이라는 연못이 어우러진 풍경이 일품이다. 아(亞) 자형의 평면구성을 하고 있는 정교하면서 아름다운 건물이다. 방화수류정이란 이름은 중국 송나라 시인 정명도의 시에서 따왔다고 한다. 

가볼 만한 곳 

융건릉 : 장조(사도세자)와 경의 왕후를 모신 융릉과 정조와 비 효의왕후를 모신 건릉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용주사 :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창건됐다. 

수원화성박물관 :수원화성의 역사에 대한 모든 것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박물관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동수원 IC에서 나와 43번 국도를 따라 진입하면 창룡문 앞에 닿는다. 서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수원역에서 내린다. 역 앞에서 장안문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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