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원릉(동구릉 내) 조선) 제1대 왕 태조 이성계의 무덤 사적 제193호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무덤, 동구릉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 태조는 계비 신덕왕후 강 씨와 함께 묻히기를 원했으나, 계모인 강 씨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태종이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과 멀리 떨어진 이곳에 태조의 능을 축조했다. 무덤은 고려 왕릉 중 가장 잘 정돈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합장릉인 헌정릉을 모태로 삼았다. 봉분 아래에는 봉토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12각의 화강암 병풍석을 둘렀다. 병풍석에는 방울, 방패 무늬와 구름 속에 서 있는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봉분 주의에 난간석을 두르고 석호와 석양을 각각 네 마리씩 배치하였다. 봉분 앞에는 망주석을 세웠다. 정면을 제외하고 석조물을 둘러싼 3면에 곡장을 둘러 1단을 이루고, 이보다 한 단 아래 장명 등을 중앙에, 양옆에 문인석 하 쌍과 석마를 두었다. 마지막 3단에는 무인석과 석마를 한쌍씩 두었다. 병풍석에 새겨진 문양이나 봉분 앞에 문인석과 무인석을 세운 것은 고려 현정릉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난간석을 두른 것이나 정명 등을 세운 것은 조선시대의 새로운 양식이다.
현릉(동구릉 내)조선 제5대 왕 문종 왕릉 사적 제193호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 씨의 능, 홍살문부터 정자각, 비각 등의 부속 시설물은 하나만 있고, 정자각 뒤 좌우 언덕에 왕과 왕비의 무덤이 단릉처럼 조성되어 있다. 효성이 극진했던 문종은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부왕인 세종대왕을 가까이에서 섬기고자 영릉 오른편 언덕을 능지로 정했으나, 땅을 파보니 바위가 있고 물이 나서 취소하고 건원릉 동쪽으로 능을 썼다고 한다. 현덕왕후 권씨는 단종의 모친으로 오랜 세월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문종의 옆에 모셔졌다.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동원이 강릉이다.. 정자각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의 능이 문종, 오른쪽 언덕의 능이 현덕왕후의 능으로 홍살문을 비롯하여 정자각 비각 등을 하나씩만 만들어 놓았고, 병풍석에는 이전 왕릉에 있던 방울 방패 무늬가 사라졌고, 구름무늬가 도드라지게 표현되었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병을 얻어 1441년 문종보다 11년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안산의 소릉에 묻혔다. 단종 복위 사건에 의해 1457년 (세조3)추폐되었다가 1512년(중종7)복위되어 다음 해 봄 문종이 묻혀 있는 현릉으로 이장되었다.
목릉(동구릉 내)사적 제193호
제14대 선조와 비 의인왕후 박 씨,, 계비 인목왕후 김 씨의 능, 동구릉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 같은 능역 안의 각각 다른 언덕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했다. 제일 왼쪽이 선조, 가운데 의인왕후,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목릉은 석물의 조형미가 가장 졸작이라는 평을 받을 만큼 모양새가 없다. 그 이유는 왕릉이 조성된 시기가 병란을 겪은 직후여서 장인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두 왕비의 능에는 병풍석만 두르지 않았을 뿐 별 차이는 없다.
같은 능역 안의 각각 다른 언덕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동원이 강릉 형식으로 왼쪽에 선조, 가운데에 의인왕후, 오른쪽에 인목왕후의 능이 있다. 선조의 능에는 3면의 곡장(나지막한 담)이 둘러져 있고, 봉분 아랫부분은 12 지신상과 구름 문양이 조각된 병풍석으로 감싸여 있다. 봉분 바깥쪽으로 난간석을 비롯하여 혼유석, 망주석 1쌍, 장명 등, 석양, 석호 각 2쌍, 문인석 무인석 각 1쌍, 석마 2쌍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의인 왕후릉과 인목 왕후릉은 비슷한 형식으로 병풍석이 생략된 채 난간석과 혼유석 망주석 장명 등 등의 석물이 있다. 목릉의 능역은 원래 의인왕후 박 씨의 왕비릉인 유릉이었다. 목릉은 1608년 태조의 능인 건원릉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터가 좋지 않고 물이 찬다 하여 우릉 자리 즉 현 위치로 옮겼고, 이때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칭하여 목릉이라 불렀다. 1632년 인목대비의 능을 조성하여 세 개의 능을 이루게 되었다.
숭릉(동구릉 내)사적제193호
제18대 현종과 비 명성왕후 김 씨의 능.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으로 두 봉분이 연결되어 있다. 왕과 왕비를 하나의 국장 안에 모셔 봉분이 나란히 2기로 조성된 쌍릉이다. 숭릉은 양옆으로 익랑을 붙여 정자각의 규모가 크다. 지붕도 맞배치붕이 아닌 팔 직 지붕이다. 봉문 앞에 세운 망주석 위쪽에 ‘세호’라는 작은 동물 조각이 뚜렷하게 조각된 점도 눈길을 끈다.
현종은 1674년 8월 18일 34세의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 영심각에서 숨을 거뒀다. 팔도의 승군 2,650명을 징발하여 능을 조성하였고, 12월 13일 조선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 남서쪽 산줄기에 예장하였다. 명성왕후는 1683년(숙종9)12월5일 창경궁 저승전 서별당에서 세상을 떠나 현종 옆에 묻혔다. 하나의 곡장(曲墻)안에 왕릉과 왕비릉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으로 난간석이 두 능을 감싸고 있다. 병풍석은 없으며, 석양,석호 각2쌍, 망주석 1쌍, 장명등 1개, 문인석,석마 각 1쌍 무인석,석마 각 1쌍의 석물을 갖추었다. 장명등과 망주석에는 인조 무덤인 장릉의 석물에서처럼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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