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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으로 대표 되는 안동 하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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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향기쉼터 2022. 9. 21.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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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으로 대표되는 양반마을 하회마을

문화유산 정보 등재 시기:2010년 7월 31일:2010년7월31일

등재이유:14-15세기에 조성된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마을, 조선시대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룬 전통 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 유교적 삶의 양식과 전통문화가 현재까지 잘 계승된다.

안동은 퇴계 이황 이후 성리학의 전통을 이어온 선비정신으로 상징되는 유교의 본고장이다. 공자와 맹자의 출생지를 따서 이름 지은 추로의 향이라는 고장답게 우리나라 선비 문화의 유산이 밀집된 전통의 고장이다. 경북 북부의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선비 문화를 가꿀 수 있었던 원동력은 역사상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조선 중기 이후로 정권에서 밀려난 남인들이 이곳에서 오랜 세월 동안 은둔하며 학문에 정진했기 때문이다. 굽힐 줄 모르는 선비정신으로 척박한 자연을 극복해가던 안동 사람들은 열 끼를 굶어도 내색을 않는다’는’ 모습으로 살아왔고 이러한 정신은 지금도 하회마을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하회마을에는 사대부집에서 초가까지 300~500년 된 고가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정형화되거나 박제된 공간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이 살고 있어 생기와 온기가 넘친다. 꼿꼿한 선비정신이 살아 있음인가, 낙동강도 마을을 부드럽게 감싸며 돌아나간다.

태백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흘러 안동 하회마을에 이르니 산은 물을 얼싸안고 물은 산을 휘감아 돈다. 물길이 S자 모양으로 집들을 감싸 안고 돌아 마을 이름도 강물이 돌아나간다는 뜻의 하회란다.

안동 하회마을(중요 민속자료122호)은 풍산 류 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며, 와가(瓦家:기와집)와 초가(草家)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된 곳이다. 특히 조선시대 대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이 일정하지 않고, 한국의 다른 마을의 집들이 정남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한 큰 와가(기와집)를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라 하겠다.

하회마을을 표현할 때 산태극 수태극이라고 한다. 풍수적으로 마을의 지형이 산과 물이 서로 얼싸안고 흐르는 태극형이기 때문이다. 또 마을의 생김새가 강물 위에 떠 있는 연꽃 같다고 해서 연화부수형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에서 설명하는 하회마을의 진면목을 보기 위해서는 강 건너 부용대에 올라야 한다. 아찔한 낭떠러지 아래로 시퍼런 강물이 흐르지만 멀리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화산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뻗어 하회마을을 뒤에서 받쳐준다. 안동시내를 지난 낙동강은 마애리를 돌아 풍산들을 적시며 병산서원과 만나고 하회마을을 에돌아 예천으로 흐른다. 강과 산의 보호를 받으며 은밀하게 들어선 하회마을은 세상의 악한 기운은 감히 범접하지 못할 지세를 갖고 있고 한눈에 보기에도 명당 터 임을 알 수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을 언급하면서 하회마을이 풍수적으로 좋은 곳임을 언급했다. ‘무릇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바닷가에 사는 것은 강가에 사는 것만 못하고 강가에 사는 것은 시냇가에 사는 것만 못하다. 대개 시냇가에 사는 것도 고개에서 멀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평시나 난시 모두 오래 살 만하다. 이러한 곳으로 영남의 도산과 하회가 으뜸이라.’

하회마을에서 마음이 원하고 발길이 닿는 곳으로 어디든 가면 된다. 하회마을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인물이 류운용과 류성룡 형제다. 이들의 후손에 의해 풍산 류 씨가 동성 집단을 넓히면서 본격적으로 류 씨 마을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류운룡은 류성룡의 형이다. 자는 홍현이며, 호는 겸암이다. 어릴 때부터 유달리 총명해 모든 경서와 사서를 통독함으로써 인재로 촉망받았다. 명종 16년(1561)23세 때 도산에서 퇴계 이황을 만나 (사기)(근사록)등 천문과 경학을 배웠다. 14대 선조 5년(1572) 아버지의 공으로 과거를 보지 않고 관직을 얻어 전함사별좌(조선시대 전함의 수리나 관리를 하던 관청의 5품 관직)로 관계에 나갔다. 이듬해 의금부도사(왕명을 받으러 죄인을 심문하던 의금부 관리)로 임명받았으나 사퇴했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미곡, , 종이, 자리 등 물품을 관할하는 풍저창의 직장(종7품)을 역임하면서 청렴성과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퐁저창직장으로 유능한 관리로 이름을 떨쳤다. 이어 왕실에서 사용되는 각종 물자를 관장하는 내자시에서 문서와 부적을 주관하던 종6품 벼슬인 주부로 승진했고, 진보현감 등을 지냈으나 어머니의 신병을 이유로 사퇴하였다가 다시 관직에 나가 광흥창 주부와 한성부 판관, 평시 서령, 사복시 첨정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선조 25(1592)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은 고니시와 가토가 조선을 침입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영의정이던 동생 류성룡이 어머니를 구출하도록 류운룡을 해직시켜달라는 건의가 받아들여져 온 가족이 무사하도록 해 효심을 칭찬받았다. 전란 중인 그해 가을에 풍기가 군수(풍기 군수 서리)가 되어 평상시와 같이 조공을 함으로써 얼마 뒤 정 군수가 되었다. 선조31년(1598)봄에 어머니를 모시고 태백산 아래 도심촌에 거하였고, 12월 동생 류성룡과 함께 도심 우사에 기거하였다.

류성룡은 네 살 때부터 글을 읽었다는 신동이다. 형 류운룡이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것과 달리 명종 19년(1564)생원.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해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문승원 권지부정자(외교문서를 담당하던 승문원의 종9품 벼슬)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 검열(임금의 말이나 명령을 대신 짓는 것을 담당한 예문관에서 사초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정 9품 벼슬)로 춘추관기사관(시정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보던 춘추관의 정6품~정9품 벼슬)을 겸직했다. 선조1년(1568) 사헌부 감찰(언론, 사법, 감찰의 역할을 하던 사헌부의 정6품 벼슬)로 성절사(중국 황제와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던 사절)의 서장관(사절단의 매일매일의 사건을 기록하는 기록관)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에 돌아왔다.

선조21년(1588)홍문관(경서와 사적의 관리, 문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대비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과 예문관의 대제학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에 일어나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를 올려 스스로 탄핵했다.

1590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듬해 좌의정으로 승진하면서 이조판서를 겸직했다. 왕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의 분쟁에서 동인이 승리, 서인 정철에 대한 처벌을 놓고 온건파인 남인에 속해 있으면서 강경파인 북인의 이산해와 대립하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 도체찰사(임시직으로 국가 비상시 왕명에 따라 군정과 민정을 총괄한 최고 군직)를 겸했다. 이어 영의정으로 왕을 호위해 평양까지 갔으나 나라를 그르쳤다는 빈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그러나 의주에 이르러 다시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인 1593년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해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3도의 도제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했다. 같은 해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했다. 군대 양성과 함께 화포 등 각종 무기 제조, 성곽 수축을 건의해 군비 확충에 노력하였으며,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건의했다.

선조 31년 명나라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사거의 진상을 변명하러 명나라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600년에 복관 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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