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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영릉 ,장릉,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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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향기쉼터 2022. 9. 19.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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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 사적 제195호

영릉은 조선 왕릉 중에서도 천하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영릉 덕분에 조선 왕조의 국운이 100년은 더 연장되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다. 이런 명성을 갖고 있는 영릉은 제4대 세종(1397~1450)과 소헌왕후(1395~1446) 심 씨의 합장릉이다.

원래 영릉은 1446년 소헌왕후 사망 후 헌릉 서쪽 대모산(현 서초구 내곡동)에 동릉이 실로 조영된 능이다. 우측 석실은 왕의 수릉으로 삼았다가 1450년 세종이 사망하자 합장해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 되었고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봉토 주위에 병풍석을 두지 않았고, 봉분 속에도 석실을 마련하지 않고 관을 구덩이인 광중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화로 메워서 다지는 희격으로 하였다. 그 이유는 예종의 부왕인 세조가 비용과 국민의 노역을 줄이기 위해 석실과 병풍석을 쓰지 말라는 유연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원되는 인력이 6000명에서 절반인 3000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종의 능은 조성될 때부터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주장 때문에 논란이 잦았다. 지관들이 강력하게 능 자리를 철회하자고 권했지만 세종은 "다른 곳에서 복지를 얻는다고 하지만 선영 곁에 묻히는 것만 하겠는가?"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일단 세종의 고집대로 능을 조성했지만 세조 때 다시 강력한 천장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서거정이 "천장함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이면 되었지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며 반대해 옮기지 못했다. 결국 예종 1(1469)에 천장 했는데 그곳이 풍수지리상 최고의 길지 중 하나라는 현재의 영릉이다.

장릉 사적 제 196호

장릉은 비운의 왕으로 알려진 제6대 단종(1441~1457)의 능이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4리에 있다. 단종이 세조의 왕위찬탈로 1457년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상왕복위 계획이 탄로 되어 죽음을 당하자 영월호장 엄흥도가 비밀리에 장례를 치렀다. 선조 때 김성일(金誠一정철 등의 장계로 묘역을 수축하고 표석을 세웠다.

단종은 문종과 현덕왕후 권 씨의 아들로, 태어난 다음 날 어머니를 여의었다. 10세 때인 1450년 아버지인 문종의 즉위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문종이 왕이 된 지 23개월 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 비극적인 왕이 된다. 단종의 신하들은 대부분 세종 대의 인재들이었다. 삼정승은 세종의 고명 을 받은 황보인, 남지, 김종서였고, 그 아래의 실무진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 등 대부분 집현전 학사 출신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왕방연이 영월에 도착하자 단종은 목을 매 자진(自盡)했다고 되어 있다. 사후 처리도 비참해 야사에 따르면 시신이 청령포 물속에 떠 있는 것을 평소부터 충성심이 강했던 영월호장 엄홍도가 몰래 수습해 장릉 자리에 안장했다고 한다. 그가 장사 지내려 할 때 주위 사람들은 후환이 두렵다며 말렸다. 하지만 그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라며 단종의 시신을 홀로 밤에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엄홍도의 충절은 높이 인정되어 그의 자손에게 벼슬자리는 물론 추후에 공조참판이라는 벼슬도 내려졌다. 이런 예를 근거로 영월 사람들은 영월이 '충절의 고장'이라는 데 대단한 긍지를 갖고 있다. 또한 장릉은 향토 문화재가 거행되는 유일한 왕릉이다. 장릉이 있는 청령포는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높은 벼랑이 있어 어디로든 빠져나갈 수 없는 천연 감옥 같은 곳이다.

청령포는 영월읍 중심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4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3면은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 면은 높은 벼랑이 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어디로든 빠져나갈 수 없는 천연 감옥 같은 곳이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유배되었던 당시에 세워 놓은 금 표 비가 아직도 남아 있다. 비에는 '동서 300, 남북 490'이라는 글씨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천하를 호령하던 왕이지만 세조는 단종이 이 공간 안에서만 생활하도록 행동 범위를 제한한 것이다. 현재 청령포에는 단종이 서울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는 80미터 높이의 낭떠러지 노산대, 망향탑 돌무더기 등 슬픈 사연이 깃든 유물들이 남아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소나무 가운데 가장 키가 큰 천연기념물 '관음송'이 있는데, 수령이 600년이나 되어 청령포에서 유일하게 단종의 유배를 지켜본 존재다. 또한 단종의 어가 주변에 조성된 소나무 숲이 270도 돌아 흐르는 서강과 어우러져 청령포는 자연경관이 뛰어난 명승지로 이름이 높다.

단종이 명예를 회복하는 데는 200년이 넘게 걸렸다. 숙종 7(1681), 숙종은 그를 일단 노산 대군으로 추봉한 뒤 숙종 24(1698) 정식으로 복위했고, 묘호를 단종으로 종묘에 부 묘했으며 능호를 장릉이라 했다.

사릉 사적 제209

사릉은 비운의 왕인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 씨(1440~1521)의 능이다. 정순왕후는 18세 때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가면서 헤어진 뒤 단종이 그 해에 사약을 받고 죽자 과부가 되었다. 이때 직위도 왕후에서 부인으로 강등되었다. 사릉은 왕릉보다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 사업소 묘포장으로 유명하다. 과거에 일반인들에게 공개한 적이 있으나 방문객이 적어 비공개 왕릉으로 분리되었다가 201311일부터 태강릉의 강릉, 동구릉의 숭릉과 함께 공개하고 있다.

조선 왕릉의 세계 문화유산 등재 당시 묘포장에 있는 종자 은행과 소나무 등 각종 유전자원이 궁궐과 능원의 생태 문화 자원 보존에 의미가 있다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알려진다. 이곳에 있는 소나무 묘목은 태백산맥 능선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묘소인 준경묘와 영경묘의 낙락장송 후손으로, 숭례문 복원에 사용될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인 소나무로 평가받고 있다. 1999년에는 사릉에서 재배된 묘목을 단종의 무덤인 영월 장릉에 옮겨 심어 단종과 정순왕후가 그간의 아쉬움을 풀고 애틋한 정을 나누도록 했다. 이때 사용된 소나무를 '정령 송(精靈松)'이라 부른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사사된 후 64년 동안 그를 기리다 82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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